이제는 몇 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, 내게는 부모님, 특히 엄마가, 내 결정을 얼마나 신뢰하고 나의 행복을 위해 고민하는지 알 수 있던 순간이기에 기록해보려고 한다.
나는 유부녀다.
한국에서 10대를 보내고서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에서 학업을 마쳤다. 그리고 처음으로 입사한 곳에서 현 남편을 만났다.
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절대 비 아시안인과는 끈적한 관계가 불가능할것이라 예상했다. 그런데 역시나, 나는 나를 모른다. 나는 나에 대한 내 예상을 뒤짚어 엎고 연갈색의 머리, 까끌거리는 수염, 그리고 헤이즐 눈을 가진 이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.
우리가 동거를 시작하려던 때는 만나기 시작 한치 채 1년이 안되었을 때였는데, 동거를 하게 된 이유도 별다른/거창한 이유는 없었다. 나는 당시 이사할곳을 알아보려던 참이었는데 이상하게 안 좋은 일들이 겹겹이 생기고 있었다. 그 모습을 가까이서 본 현 남편/구남자 친구가 동거를 제안했고 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.
흔히 말하는 "미국 서타일" 대로라면 동거가 별거냐~ 하며 쿨해야 할 것 같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. 미국에서 10년을 넘게 살고 있었지만 동거는 '해도 되는 걸까?'라는 고민이 들었다.
그리고 고민끝에 현 남편/구남자 친구와 동거를 수락했다. 단, 조건이 붙었다.
"내 엄마가 반대한다면 나는 엄마의 반대를 꺾으면서까지 동거를 하고 싶지는 않아."
이상하다.
나는 이제껏 부모님의 말들을 한귀로듣고 한 귀로 흘리는 타입이었는데 이상하게 이때만큼은 부모님, 특히 엄마의 온전한 동의를 필요로 했다.
엄마가 당신의 딸, 나에 대해 이야기할때 창피해하지 않았으면 싶었다. 그게 다였다.
나는 엄마가 수년간 희생해온 과정의 결과라는걸 아주 잘 알고 있다. 그리고 그 결과로 "만족"이라는 감정을 엄마에게 주고 싶었다. "창피함"을 그녀에게 결과로 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. 그건 못할 짓이었다.
서양권 문화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이유건만, 현 남편/구 남자친구는 알겠다며 이해한다 말해주었고,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알려달라고 말했다.
그리고 영상통화를 하기로 한 주말이 다가왔다.
나는 엄마에게 엄마의 솔직한 생각이 필요하다고 물꼬를 트고는 동거에 대해 바로 물어보았다.
"엄마, 나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 친구랑 동거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? 솔직하게 이야기해줘. 엄마가 반대하면 하지 않을 거야. 한국에서는 동거를 좋지 않게 보는 거 아니까 엄마의 생각을 물어보는 거야."
엄마의 대답은 정말 의외였다.
"그 친구랑 같이 산다고? 그래 정말 좋은 생각이다."
엥?
????????
'-'
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닌데?
웃음이 터져 나왔다.
"아니 엄마, 좋은 생각이라니?"
엄마는 여행도 동서아시아 쪽으로만 가는, 서양권 문화와는 아-주 거리가 먼 60대의 여성이다. 때문에 "동거"라는 단어에 언짢아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는 역시 엄마를 아직도 모른다.
엄마는 내게 이런 말들을 해 주었다.
둘이 잘 만나고 있고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응원해주는 사이인데, 같이 산다고 하면 엄마도 네 행복이나 안전에 대해 한시름 놓을 것 같다했다. 그리고 엄마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타국에서 혼자 생활하는 나의 안전과 건강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한다 말했고, 때문에 현 남편/구 남자친구와 함께 살게 된다면 엄마로서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.
엄마는 내 동거에 찬성이었다.
옆에 있던 아빠가 조금 고민되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아빠도 엄마 말에 동의한다 했다.
그리고 나의 부모님은 우리가 괜찮다면 현 남편/구 남자친구와도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. (당시 나는 '나의 애인과 내 가족이 알고 지낼 필요는 없다.'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주 칼같이 내 가족과 현 남편/구남자 친구와의 관계를 차단했었다.)
잊고 있었다.
우리 엄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, 부활절에는 예수의 부활을 기리며 "붓다의 인생"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며 휴머니즘을 수련하는, 정말이지 나보다 수십 배는 더 진보적인 사람이었다.
음, 나는 갈길이 멀다.
사진은 동거를 한 지 1년? 2년이 지난 후, 내 동거남과 결혼한 날의 사진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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